"왜 싫다고 하지 않았냐"와 가해자 감성에 젖은 이들에 대해

@earlybird316 · 2018-07-09 12:48 · kr

승무원들에게 회장이 나타나면 팔짱을 끼게 하고, 안아주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시키고, 찬양가를 지어 부르게 시켰다는 항공 회사의 갑질 내용은 듣기 불쾌하다. 불쾌한 기사제목을 클릭해보자. 거북한 기사내용이 나온다. 거북한 기사의 끝에는 더 거북스러운 댓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싫으면 진작 싫다고 하지 왜 다 해놓고 딴 말이냐", "돈이 좋아서 저래놓고 왜 이제 싫다고 난리냐"

비상식적인 폭력을 당한 이들에게 냉소와 비웃음으로 자신의 정상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은 이렇게 비웃고 있음으로서 상식적인 위치에 있어보일거라 착각하지만, 그들의 무식함. 고통과 피해에 대한 무지함이야말로 정말 꺼내기 거북스러운 비상식과 잇닿아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한다. 동네에서 강도들에게 칼을 맞은 사람들에게 "칼을 왜 피하지 않냐?"고 시크하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동네에 살지 않거나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 밖에 없다. 성희롱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왜 거부하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들은 성폭행 피해의 위험이 없거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 밖에 없다.

피해의 위험이 없는 것, 아무런 생각 없어도 살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권력에 속한다. 당신의 안전과 당신의 무지함은 당연한 것도,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연함이 남들에게도 똑같은 당연함으로 받아질거라 믿고 행동해도 지금껏 아무도 의심 없어보이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권력적 사고에 익숙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폭력의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고발에 대해 "그 정도껏 가지고 난리냐고", "왜 그때 말하지 않고 이제와서 말하냐고" 한다. 피해를 '그 정도껏'이라 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정도'가 상식이어서가 아니라 철저히 가해자적 권력에 익숙한 사고방식 때문인 것이다. 그 고통을 이제까지 혼자 참아내도록 내버려 둔 것이 권력인 것이다.

이런 사고에 젖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문제제기 당함에 감수성을 느끼는 표현을 쓴다. 일베 사이트의 단어사용은 이런 특징을 잘 나타낸다. 글의 작성자가 여러 댓글로 비난을 받을 때 '민주화 당했다'며 낄낄거리는 그들의 표현에는 독재정권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비웃고, 차라리 독재 권력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에 근접하려는 감성이 담겨있다. 승무원의 갑질 호소에 되려 승무원들을 비난하는 이들과 일베가 겹쳐보이는 것은 이것이 한 특정사이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만연한 사고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갑질에 의해 회장을 안아야하고, 억지눈물을 흘리고, 찬양해야했던 승무원들의 고통과 비로소 용기를 낸 호소보다는 "왜 싫다고 하지 않았냐"라는 질문이 더 상식적으로 와닿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식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피해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섣부른 말과 판단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권력적 사고에 젖은 감수성. 가해자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것이 싫어 피해자를 탓하며 물타려 들었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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