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덕분에 16강에 가게 되었다며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누르고 찢어진 눈포즈를 취하는 그들은. '고마워 한국'(grasias korea) 해쉬태그와 함께 찢어진 눈 단체샷을 찍어올리는 그들은. 사실은 인종차별의 아무런 뜻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표정은 해맑고 순진하다.
천진난만한 그들에게 가서 '너희들 사진이 불쾌하다'는 뜻을 전하면 어떨까? 그들이 뭐라고 할까. "뭘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정색하고 그래? 너희 설마 프로불편러야? 그냥 동양인을 표현한거고 비하의 뜻이 아니잖아."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비하의 뜻을 품었든 품지 않았든, 그들의 사진 속에는 '우리는 주체들, 너희는 찢어진 눈이 특징인(동양인) 대상들'이라는 불쾌한 시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멕시코 축구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흑인들의 미친 가창력>이라는 기사제목에는 흑인은 인간의 기본값으로 표현되기에는 불충분한 대상이라는, 그래서 개인의 개성으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흑인이라는 특징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교만한 대상화가 씌워져있다. 이 얘기가 과해보이겠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수학성적을 보고 <황인의 수학실력>이라는 기사제목을 뽑을때. 당신도 역시 불편해질 것이다. 천진난만한 멕시코 축구팬들이 웃으며 찍은 찢긴 눈포즈를 볼 때처럼.
PC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PC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사회의 언어표현은 그 사회의 시각을 보여준다. 언어표현에는 아직도 불공정한 사회의 모습과 일그러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담겨있다.
나 역시 광적인 PC첨삭주의자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한국사회에서는 PC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로불편러라는 말을 때때로 칭찬으로 받아들이자. 멕시코 축구팬들의 순진한 웃음을 자세히 살펴보자. 무엇에 불쾌해지는지 느껴보자.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표현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게 되는지 떠올려보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성실한 대학생이 '참한 여대생'이란 단어로 치환되고, 환자를 열심히 돌보는 간호사의 사진이 '땀에 흠뻑 젖은 여간호사'라는 기사제목으로 소비되는 사회. 개인이 성격도 개성도 아닌 상품의 대상으로만 표현되는 사회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영혼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