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4 | 무게 잡기의 종말

@emotionalp · 2019-01-28 04:11 ·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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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시에서 본 인터뷰 영상에서 한 나이 든 연극 배우는 말했다. 예전의 다방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철학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흔한 일이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렇게 지식으로 무게를 잡던 시절이었다고. 요즘은 그렇지 않고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

문득, '무게를 잡는다'는 표현을 들어본지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주로 과거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자주 쓰이지 않는 오래된 표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느 틈에 무게를 잡는 분위기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가벼워졌다.


확실히 가벼워졌다. 무엇이 얼마큼 가벼워졌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가벼워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가벼워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과거에는 좋게 바라보았던 괜한 무게를 잡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게다가, 모든 환경들이 너무 빠르고 쉽게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의 호흡은 빠르고 가벼운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감과 즉흥성을 즐기는 놀이가 만나 가벼움의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가볍다는 것은 그 자체를 묘사하는 형용사일 뿐,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자칫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쉽고 즐길만한 것들이 많아졌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이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것들이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주게 되면서 가벼움은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을 필기체로 기록한 에세이나 브이로그, 채색되지 않은 낙서 같은 일러스트가 사랑받는 이유가 그 가벼움으로 채워낸 여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아함의 양면성


솔직하고 담백한 것들의 심심한 맛을 즐기게 되면서 예전보다 대우를 덜 받게 된 것은 바로 '우아함'이다. 묵직한 감성들이 감싸던 시대에 우아함은 격조를 높이는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우아함은 양면적이다. 고급스러운 우아함은 자칫 그 포장이 두텁고 화려해지기 십상인데, 그것이 과해지면 경직된 엘리트주의가 되기도 한다. 벽을 치고 편을 갈라서 우아한 그들만의 있어빌리티 리그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우아함은 고급스러워질 수도 한없이 값싸질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우아함은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다. 민낯을 숨기고 쓴 우아함이라는 가면에 사람들은 피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 웃을 수 없었던 것들이 가득 차서 하나둘씩 가면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끝내 풀어내어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드러내듯 무게를 덜어내고 있다.




가벼워졌다는 것이 반드시 깊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아함을 내려놓는 대신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에 눈을 돌리고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에 몰두한다. 그리고 오래된 것들 중에서도 특유의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봤던 많은 글과 그림, 사진, 영화들과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들에서 다시금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쾌락적일 수도 지극히 상업적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벗어날 수 없는 현재 시점의 배경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시대적 무게감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다.






P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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