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 라슨?” 영화 <캡틴 마블>의 라인업이 발표되었을 때, 나도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캡틴 마블은 앞으로 어벤저스를 이끌 차세대 주자라고 하는데, 사진으로 미리 접한 이 히어로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을 만한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랙 위도우의 ‘스칼렛 요한슨’이나, 원더우먼의 ‘갤 가돗’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의 여성 히어로가 자연스레 오버랩 되었다.
주인공 브리 라슨에 관한 논쟁은 <캡틴 마블> 개봉 전 몇 달 동안 계속 이어졌다. 개봉 후에도 일부 영화 팬들 사이에서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아, 주인공만 좀…….’ 하는 아쉬움을 가졌다. 영화를 본 지금은 어떠냐고? 내가 틀렸고, 마블이 옳았다.
마블이 옳았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마블 측에선 논쟁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정신이 녹아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캐스팅할 때 기존 여성 히어로의 주인공이 가졌을 법한 화려한 외모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마블의 수장은 브리 라슨이 캐럴 댄버스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런 해명은 의례적으로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동일한 느낌을 받았겠지만, <캡틴 마블>을 보면서 내가 가진 선입견이 붕괴되는 경험을 했다. 브리 라슨은 단순히 페미니즘의 정신에 입각해서 선택된, ‘덜 예쁜’ 배우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캐롤 댄버스에 푹 빠져 있었다, 캐롤은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아픔이 있지만, 어떤 남자 캐릭터보다 유머러스하고 유쾌했으며, 강인했다.
캐스팅 후 발표된 캡틴 마블의 사진은 캐롤 댄버스를 연기한 브리 라슨의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다. 브리 라슨의 매력은 외모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더듬더듬 찾는 한 사람과, 임무를 이행해야 하는 이성과 임무 이행 중 만나는 사람들을 향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낯선 곳에서 만난 닉 퓨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솔직한 모습으로 인간적인 교분을 쌓아가는 인물, 이 다양한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영화를 본 후 브리 라슨은 그 어떤 여성 히어로들보다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친근함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남성의 한 사람으로, 영화 개봉 전 여성 주인공에 대한 평가를, 거의 '사진'(외모)만으로 했다는 반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성을 자의적으로 ‘정의(定義)’ 내려온 사회 속에서
영화의 초반, 기억을 잃은 채, 크리족의 전사로 훈련받는 캐롤 댄버스에게 욘 로그는 ‘감정적이어선 안 돼, 감정을 통제하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는 여성이 어떤 일을 완수하거나 도전할 때 여성만이 가진 특질을 버려야 한다는 통념에 부딪혀 왔다는 걸 드러낸다. 이 상황은 후에, 캐롤 댄버스가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이나 할 법하다고 사회적으로 정의된 일들에 도전할 때 제약을 겪은 장면과 이어지면서, 이 세계에 많은 일들이, 남성 혹은 여성에 적합다고 정의되어 왔으며 그 통념으로 인해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영화 말미에 캐롤 댄버스는 가렸던 진실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각성에 한 발짝 나아간다. 주인공은 새로운 적에 의해 온 몸이 결박되는 상황에 처하고, 마음속에서, “너는 이래야 해!” 하는 목소리를 거부하며 새로운 확신에 다다르게 된다. 각성에 이르자, 주인공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힘이 발현된다. 온 몸의 결박을 떨쳐내면서 캐롤 댄버스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외친다.
“난 항상 통제된 상태로 싸워왔지.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 대사는 단지 그 장면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이건 그간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수많은 억압과 차별, 통제된 상황을 겪어왔고, 이 모든 억압을 깨뜨리고 자유로워진다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그간 발휘하지 못한 잠재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에 대한 거대한 은유인 것이다.
그 대사를 들으며, 나 역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간 남성인 내가 사회 속 젠더에 관한 통념에 대해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가, 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억압과 통제와 싸우며 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새로운 각성이 생겨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페미니즘을 다룬 논문이나 대단한 석학의 도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영화 한 편을 통해 얻은 생각이다. 그것도 쏘고 부수고 악을 응징하는 히어로 오락물을 통해서 말이다.
어떤 영화가 내게 의미 있는 영화로 남을 때는, 많은 단서가 필요치 않다. 단지 내 마음의 채에 ‘각성’ 하나가 남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캡틴 마블>이 그랬고, 그러기에 난 캐롤 댄버스를 어벤저스의 차세대 리더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