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웃는 게 쉬웠는데

@kyslmate · 2019-11-12 22:14 ·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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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엔 웃는 일이 제일 쉬웠다. 우스울 때 웃는 건 물론이고, 멋쩍을 때도, 어색할 때도, 아무 생각 안 할 때도, 좋을 때도, 싫을 때도 실실거렸다. 제일 이상했던 건,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짓곤 했던 일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석규가 빙그레 미소 짓는 걸 떠올리며 같이 웃곤 했다. 카메라가 날 찍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상황이 난처할 때도 가장 먼저 나오던 나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내 웃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놓을 수 있는 조커 패와 같았다. 조금씩 결이 다른 웃음들은 저마다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고, 구구절절한 말보다 웃음 하나로 많은 걸 설명하려했었다. 20대 시절엔 그게 가능했다. 웃음 하나로 많은 걸 설명하는 일 말이다. 내 웃음을 보고 대부분의 상대방은 그 상황에서 들어야 할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발령을 받기 전 잠시 기간제로 일할 때, 그 학교가 복지 시범학교로 선정된 탓에 아이들 가정 방문을 다닌 적이 있다. 그때도 웃음을 얼굴에 장착하고 이 집 저 집을 다녔다. 그 웃음에 별 의미는 없었다. 굳이 뜻을 찾는다면, '그래요, 이렇게 학생들 집에 다니는 게 전 어색해요. 소금 뿌리지 않으실 거죠? 개는 단단히 묶어 두셨죠?' 하는 의미 정도 되겠다.

한 아이의 집에 갔는데 방에 앉아 두리번거리던 내게 부모 대신 아이를 키우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사는 꼴이 참 우습죠?" "아, 아닙니다." 내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상황에 따라 웃음을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구나, 상대가 조롱으로 받아 들일수도 있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생각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내 웃음은 상대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불러일으켰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뜻 없이, 그저 선의로, 심심해서, 배가 고파서,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실없어서 웃는다고 생각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웃던 웃음에 하나하나 의미를 새겨 넣고 상대가 어떻게 해석할지를 미리 헤아리기 시작하자, 웃는 일이 점점 물에 젖은 솜이불이 되어갔다.

이제 중년으로 돌입하는 나이가 되고,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내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다. 예전엔 웃는 게 가장 쉬웠고, 일상적이었었는데 말이다. 난 지금도 무표정을 장착하고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웃긴 일 없는데 한 번 웃으려면 꽤 에너지를 써야한다. 예전엔 웃을 때 나 스스로 밝아졌다는 자의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우습게 보인다는 자의식이 생긴 것 같다. 나도 별 수 없이 무뚝뚝한 아저씨가 되어가는 것인가.

난 아직도 실없고, 심심하고, 외롭고, 어색하고, 무안하고, 조마조마할 때, 웃고 싶은데. 나도 그런 순간에 둘러쌓여 있다는 걸 들키고 싶은데. 나이 먹은 나는 그런 순간들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철벽 수비 전술만 경기 내내 구사하는 축구팀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상이 이어진다. 허술하게 보이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청년기는 어디로 가고, 쉽게 보이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진다, 는 근본 없는 철학이 내 삶을 잠식하고 있다.

웃는 법을 완전히 잃기 전에, 입 꼬리 주변 근육들을 부지런히 문질러야겠다. 잃어버린 '실없음'을 다시 주워들고, 가려왔던 허술함을 만방에 공표해야지. 아, 생각만 해도 설레고…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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