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문장을 훔치고 싶은 나날들

@qrwerq · 2018-10-11 11:17 · kr


매체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좋은 글들을 보며 생각했다. 문장들을 잘 프린트 한 뒤에 한 단어씩, 한 문장씩 찢어서 삼키고 소화시키다보면 나도 어느샌가 그러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여러 갈래의 문장들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들과 취향은 으레 존재하기 마련이고 꼭 맞는 어구를 보게되면 나는 훔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어떤 문장들은 두고두고 필사하게 되기도 한다.)

굳이 억지로 적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최근 작업하던 비평은 두 페이지 남짓 적다가 그만두었다. 비평이란 결국 어떤 작품의 주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무리 개똥 같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위에 좋은 해석과 외연의 확장을 둘 수 있다면 괜찮은 작업일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진행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적는 작업의 결과물은 나로서도 독자로서도 별로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멈추었다. 약간은 아쉽게 된 느낌이지만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계획했던 작업을 포기한다는 것이 사실 개운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괜찮아졌다.

가끔 토해내듯 끄적거리며 적고 싶을 때가 있다. 애초에 탄탄한 문장의 형태로 사고하기 보다는 직관의 형태로 상념을 잡아가며 글을 쓰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형태는 조금 더 시(詩)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시를 적는다는 뜻은 아니다. 제대로 시를 적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며 정상과 정상이 아닌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상 미묘한 지점을 잘 포착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결국 대부분에게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다시 말하자면 조현병 환자가 적는 듯한 시어의 파편들이 터지더라도 일관성과 규칙성을 잘 잡아야한다는 소리다. 이건 내가 좋아하거나 추구하는 세계가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사실 함민복 선생님이나 심보선 선생님이 그려내는 세계처럼 따뜻하고 인간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사실 꾸준함의 신화를 잘 믿지 않는다. 입력이 없는 꾸준함이란, 그냥 무의미한 출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매너리즘에 빠질 때 쯤 되면 차라리 문장을 씹어 삼키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문장이 어렵다면, 아예 삶의 경계 밖으로 한번 디디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도 말로만 쉽지 무척 어렵지만, 원체 우리에게 쉬운 일이 있기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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