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소설 - 케이의 출근길

@sadmt · 2018-12-03 02:20 · bu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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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국도를 타야겠다. 운전대 위에 손바닥을 올려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번갈아서 돌렸다. 원심력이 몸의 안정감을 튕겨내지 않는 범위에서 가속과 감속 페달을 밟았다. 아무렇게나 풀어 놓은 실타래처럼 2차선 도로는 번민으로 엉켜있었다. 엉킨 실타래는 케이의 머리속에도 있다. 풀어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하나씩 쌓아 올린 블럭이 완성 직전에 무너졌다. 케이는 널브러진 블록들 앞에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잊은 어린아이였다.

케이는 익숙한 솜씨로 구불구불한 길을 기어올라 야산을 넘었다. 과속 방지턱 몇 개를 연달아지나 앞서가는 덤프트럭의 꽁지에 따라 붙었다. 우뚝 솟은 덤프트럭은 천천히 움직이며 육중함의 의미를 몸소 보여주었다. 오늘은 추월하지 않기로 했다. 두껍고 투명한 유리 벽에 부딪혀 전진하지 못하는 꿈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룰 때면 어김없이 찾아왔다. 잠을 청할수록 검은 눈두덩에 생경하고 복잡한 미로가 그려졌다. 살아 움직이는 시신경이 미로를 좇다가 날이 밝을 즈음에야 스르륵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면 두꺼운 유리 벽에 가로막힌 채 깨어나곤 했다.

시간에 그을릴 대로 그을린 중 늙은이 케이는 언제나 기다림이 문제 해결의 열쇠였음을 잘 알고 있다. 삶은 책장을 넘기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챕터가 자신을 반기고 과거는 밑줄 친 부분만 남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오늘과 내일은 같아 보여도 일주일 후나 한 달 후의 자신은 전혀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번민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순식간에 불어닥치는 태양풍이 몇 번이고 케이의 마음을 훑고 지나가 그의 몸에 있던 회로란 회로는 모두 먹통이 되어 버렸다. 덤프트럭이 우회전으로 시야를 벗어나자 케이는 깊게 심호흡했다.

회사라고 해서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의무적인 일을 손 가는 대로 처리하고 나면 케이는 을씨년스러운 가을 풍경처럼 잠잠해진다. 근래 출근하는 일은 까끌한 음식을 삼키는 기분과 같았다. 눈 시리게 알싸한 바람을 맞는 출근길 30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케이는 작은 읍내를 지나 논 사잇길을 달렸다. 편대 비행을 하던 기러기 수십 마리가 일제히 논바닥에 앉았다. 반대편에서는 다른 기러기 떼가 창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주워 먹을 이삭이 남아 있는 것인지 논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케이는 문득 날고 싶었다. 속박이 그를 옥죄어서가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본능처럼 내비치는 타인에 대한 경계와 대승적 논리로 치장한 보신주의가 그에게는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한 도가니에 들어가 점잖지 못한 자기 연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끈적하고 미끄런 생명체를 조몰락거리는 기분이었다. 훌쩍 날아올라 모든 것을 넌지시 내려다보는 새가 되고 싶었다.

태양은 벌써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케이는 태양을 마주 보며 달렸다. 유리창을 통과해서 손등에 앉은 햇볕이 따사롭지는 않았다. 가로수마다 달린 마른 낙엽이 늦가을의 정취를 품고 있었다. 곧 눈이 올 테고 그다음엔 꽃이 피겠지. 머지않아 끝날 가을처럼 케이의 출근길도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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