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동에는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다. 뒤편으로는 병풍 같은 매봉산 자락이 보이고 앞쪽으로 넓은 운동장 너머 더 넓은 밭이 펼쳐져 있는 학교였다. 입학 당시 손수건에 덧대어 가슴에 꽂은 커다란 이름표는 곧 작고 동그랗게 생긴 주황색 '명찰'이 대신했고 교가는 수도 없이 불러제껴서 아직도 기억한다. 매봉산 기슭에 모인 우리들 우리는 씩씩한 수안 어린이. 입학 시에는 수안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고 중간에 학교 이름이 바뀌어 졸업장에는 상암초등학교 직인이 찍혔다. 얌전히 한 학교만 다닌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네 번의 전학 경험이 있다. 3학년 때 망원동의 동교초등학교로 전학 갔다가 4학년 초에 상암으로 돌아왔고 6학년 1학기에 수영장까지 갖춘 영등포 쪽 어느 초등학교로 전학 갔다가 6학년 2학기에 다시 상암으로 컴백했다. 수영장이 있던 그 학교에서는 백일장에 제출한 동시가 입상해서 교실 벽면에 액자로 걸리기도 했다. 수상 소감 대신 몇몇 친구가 어디서 베꼈냐, 꼭 찾아내고 말겠다는 애교스런 협박에 혹시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애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유행하던 소년 중앙이나 소년 동아 같은 잡지에서 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학교로 전학 가던 날 상암 초등학교 6학년 1반 교실에서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께 잘 가라는 환송도 받았고 짝꿍이었던 현주에게 스케치북도 선물로 받았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다시 못 볼 것처럼 눈물을 찔찔 짜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 첫날, 몇 달 전 울며 떠났던 그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동교초등학교에서는 승훈이라는 친구가 생각난다. 근처에 살고 있어서 등하교를 함께 했다. 복잡한 가정사에 가난하기까지 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그의 집은 큰길 사거리에 자리 잡은 2층집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연립주택 반지하 집보다 넓은, 창고로 쓰는 그의 집 반지하실에는 탁구대가 있어서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 계란형 얼굴에 하얀 피부,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두툼한 안경을 꼈던 승훈이는 책을 많이 읽던 완전 샌님 스타일의 조용한 친구였다. 그와의 등하굣길이 즐거웠다. 동화책을 줄줄이 꿰고 있던 그는 책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 주었다. 나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그의 이야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집중해서 들었다. 아무 이야기도 안 하던 날은 조르고 졸라서 기어코 그의 선물 꾸러미를 받아 내었다. 그런 일에도 그는 짜증 내지 않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곤 했다. 지극히 착한 녀석 같으니... 학교 가는 길, 건물들과 포장도로 사이에 외롭게 자리한 작은 논이 모내기를 끝내고 어느새 스케이트장이 되어 또래 친구들로 북적거리다가 해를 넘겨 벼 이파리 푸르게 짙어질 때쯤 나는 상암 초등학교로 돌아왔다. 야구도 하고 나대지 어딘가에 자신만의 보물을 숨기기도 하고 구리선을 고물 장수에게 팔기 위해 잘린 전선을 모아서 함께 태우던 연립주택 단지의 친구들과도 헤어졌다. 피복을 태워 없앤 구리선을 둥그렇게 뭉쳐서 보관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고물 장수에게 주면 거금 몇백 원을 벌 수 있었다. 드래곤 볼에서 선보인 초창기 에네르기파 정도의 크기였다. 장비가 주렁주렁 달린 복대를 차고 전봇대에 올라 우리에게 일용할 전선을 똑똑 잘라 떨어뜨려 주신 아저씨와 작별인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성산대교 북단으로 이어진 거대한 성벽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 동네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그해 겨울, 승훈이를 만나기 위해 딱 한 번 그 동네를 다시 방문했었다.
상암동은 나에게 고향과도 같다. 태어나지만 않았을 뿐 상암동은 청소년기까지 내 삶의 터전이었다. 잠깐의 외도가 몇 번 있었어도 한갓진 서울 변두리의 그 모습은 그곳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대로였고 함께 커가는 친구들 또한 그랬다. 지금은 구시가지의 옛길만이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고 난지도가 하늘공원으로 변신하고 각종 브랜드의 아파트가 즐비하고 빌딩 숲에 유명한 기업체들이 속속 들어앉은 모습은 천지개벽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돌아온 초등학교 4학년의 상암동은 1년여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과도 다시 친해졌고 여름 내내 흙밭을 뒹굴고 매봉산을 오르며 망원동의 기억을 몽땅 잊어버렸다. 쉽게 잊고 쉽게 습득하는 것은 초등학생의 특권이다. 망원동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초등 4학년에게 중요한 것은 내달리는 일이지 뒤돌아 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잊었다고 해서 지우개로 박박 지운 듯 백지장으로 돌아갈 리는 없다. 문득 생각날 때도 있었는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이었다.
한 해 전 크리스마스 때 승훈이와 카드를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크리스마스 카드를 몇 개씩 직접 만들던 시절이라 승훈이를 위한 카드 하나쯤 더 만드는 일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단지 카드 주인공 중의 하나가 왜 승훈이였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나는 승훈이의 주소도 모르고 있었다. 카드를 부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조잡하게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 하나가 주인을 못 만난 채 가방 한쪽에서 영원한 미아가 될 참이었다. 그러나 기왕 카드를 만들고 나니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침, 나는 동네 XX친구 하나를 꼬드겼다. 그리고 자전거를 빌렸다. 아마도 중고생 형에게 빌린 듯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초등 4학년이 타기에 너무 컸기 때문이다. 변속기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노동력을 투하하는 만큼만 달려주는 자전거였다.
후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