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하나 남은 캔맥주를 저세상으로 보냈다. 그런 걸 기억해내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퇴근길에 불현듯 생각나서 우리 아파트 단지를 지나쳐 마트로 향했다. 왼쪽 어깨에 있던 천사가 속삭였다. 오늘 하루도 애썼으니 캔맥주 한잔하고 푹 쉬렴... 오른쪽 어깨에 앉아 코를 파고 있던 앙마가 따분한 듯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찐한 거로 하지 그래. 어차피 3일 후에는 쉬잖아... 왼손이 캔맥주 번들을 하나 집어 들었고 오른손은 연태 고량주로 향했다. 난 분명 두 놈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거다. 그런데 앙마는 웃었고 천사는 화를 냈다. 절대자는 천사와 앙마를 만들어 함께 키웠지만, 인성교육에는 소홀했다. 두 놈 다 존댓말을 모른다. 술김에 연태 고량주를 예찬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독한 술이 당길 때는 이 술을 찾았다. 어수선한 책상에서 필요한 학용품을 찾는 일은 경험상 불가능하다. 대뇌피질이 제정신을 못 찾을 때는 독한 술이 약이다.
캔맥주 번들을 손에 들고 고량주는 주머니에 넣었다. 두꺼운 겨울 외투 주머니는 넉넉해서 고량주 한 병쯤 티 안나게 숨길 수 있다. 아내는 간단한 안줏거리로 햄을 구워 주었다. 맥주에 반찬거리만 먹는 신랑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동이었을 것이다. 내 하루는 주로 맥주 한 캔으로 마감한다. 아이들 먹다 남은 반찬 한두 가지면 맥주 안주로는 충분하다. 안주가 필요한 날이면, 그러니까 좀 독한 술을 먹는 날이면 미리 이실직고한다. 제과점 표 샐러드나 반찬가게 표 두부조림은 고량주 안주로 적절하지 않다. 양장피나 깐풍기면 좋겠지만, 구운 햄도 나쁘지 않다. 엊그제 진탕 마시고 들어와서 오늘 고량주 먹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근래 독한 술을 자주 찾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리를 돌고 있다. 난 생각이 많은 놈이다.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고, 지나고 나서야 깨닫고, 두고두고 가슴에 묻어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자책도 후회도 질문도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의 트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소굿 님의 포스팅 때문에 보쌈이 심하게 먹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고량주를 마실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차마 보쌈을 시켜달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세상의 이치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마음이 평평하지 못하고 산란스러울 때 뭔가 끄적거리는 것조차 고통이라는 것. 그건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