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

@thelump · 2019-03-19 16:38 · kr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초견(初見)이라고 한다. 나는 초견이 형편없다. 굼뱅이가 기어가는 수준이다. 기본기를 제대로 닦지 않고 바로 연주하고 싶은 곡을 야금야금 쳐왔던 악순환의 역사 덕분이다. 다른 연주자들이 하루 걸릴 악보라면 내겐 한달이 필요하다. 영어 능력자가 어떤 문장을 즉석에서 번역할 수 있다면, 나는 항공모함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기분으로 분열된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겨우 문장이 된다.
초견이 저질이라 좋은 점도 있다.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라며 수차례 헛발질하던 손가락이 점차 자리를 찾아갈 때의 그 다이나믹한 변화를 매번 체험하기 때문이다. 연습에 장사 없다. 치다보면 어느 순간 결국은, 된다. 요약하면 "응? 헛, 엇, 아, 아.., 으! 으앗! 응? 어? 어! 오!!" 의 과정이다. 두 마디 안의 좁은 세계지만 그 안에서 오늘 나는 4시간만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을 아껴가며 피아노 연습실을 가득 메우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없다.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악기를 연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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