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 이별

@afinesword · 2018-12-25 08:53 · busy

오래 사랑한 사람이 별 이유 없이, 갑자기 싫어지기도 한다. 나는 애교가 많은 그를 사랑했다. 나는 그 애교 때문에 그가 싫어졌다.

지난 사랑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시계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기계식 시계 하나를 10년 조금 넘게 찼다. 나는 그 시계를 사랑했다.

물론, 이 시계 말고도 갖고 싶은 시계가 서넛쯤 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시계를 갖게 되더라도(실은 못 가질 확률이 훨씬 높다) 평생, 이 시계를 곁에 두고 자주 찰 생각이었다.

브랜드의 파워, 가격, 성능 따위를 다 제하고 내가 보기에 내 시계는 시중의 시계 중에서 제일로 잘 생겼다. 물론, 24시간마다 밥을 줘야 하고 방수 기능이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시계가 싫어졌다. 내 시계를 포함해 모든 기계식 시계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흔히 기계식 시계는 대대손손 물려가며 차는 것이라고 한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기계식 시계는 100년도 찰 수 있다, 잘 관리해 주기만 한다면. 기계식 시계는 주기적으로, 한 3~5년 간격으로 분해소제를 해야 한다. 뚜껑을 열어 먼지를 제거하고 기름칠도 해야 한다는 소리다.

기계식 시계는 너무 작고 또 너무 민감하다. 당연히 내가 분해소제를 할 수 없다. 전문가에게 분해소제를 맡기면 꽤 많은 돈이 든다. 내 시계는 한 50만원쯤, 내가 사고 싶은 시계는 100만원쯤 한다.

하루에 몇 초씩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분해소제를 할 때가 된 것이다. 지금 이 시계를 차면서 여러 번 별 거부감 없이 분해소제를 맡겼다.

언젠가 뚜껑이 열린 내 시계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작고 정밀하고 꽉 짜인, 아름다운 세계였다.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이기도 했다.

분해소제를 앞두고 나는 내 시계가 싫어졌다. 돈 50만원이 아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녔다. 아름다운 세계는 작은 충격에 쉬 깨질 나약한 세계이기도 했다. 그 나약함이 치가 떨리도록 싫어졌다.

분해소제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돈에 돈을 더 모아 은팔찌를 하나 살 것이다. 녹이 슬지도, 고장나지도,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을 은팔찌를 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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