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알프와 제제알프제에서 힘든 트레킹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아펜첼(Appenzell) 마을이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의 웅장한 자연을 뒤로하고 마을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즈넉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산에서의 거친 숨결이 가라앉고,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평화로운 정취가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주더군요.
아펜첼은 스위스 동북부, 아펜첼 이너로드(Appenzell Innerrhoden) 주의 중심지로, 인구는 많지 않지만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지역입니다. 이곳은 스위스에서도 특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20세기 후반까지도 남성만 투표권을 행사하던 마지막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전통을 지키는 마을의 분위기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알록달록한 목조건물들입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지어진 전통 가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목재 외벽에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색채가 입혀져 있어 마치 그림책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건물 외벽에는 당시 장인들이 직접 그린 문양이나 문장이 남아 있는데, 각 집마다 고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알프스 지방의 혹독한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요. 두꺼운 목재 구조는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고, 좁고 경사진 지붕은 눈이 쉽게 쌓이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화려한 색과 장식은 단순히 미적인 이유뿐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아펜첼은 이 전통 건축물을 잘 보존하여,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 박물관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저는 그저 멈춰서 오래된 목조건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화려한 관광지의 조명이 없어도, 오래된 건물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었거든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어우러진 곳. 아펜첼은 바로 그런 매력을 지닌 마을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이 곳에서 유명하다는 치즈를 맛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네요.